클림트 키스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이 “로맨틱한 그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이 작품은 달콤한 장면 하나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배경은 깊이감이 거의 없는 황금의 장막처럼 펼쳐지고, 두 인물은 서로를 껴안고 있지만 동시에 거대한 무늬의 망토 속에 흡수되듯 묻혀 있습니다. 가까이 보면 기하학적 패턴과 꽃무늬가 촘촘히 충돌하고,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의 빛이 됩니다. 그래서 클림트 키스는 연인의 키스라기보다 “사랑을 어떻게 상징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시각적 답처럼 작동합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클림트 키스의 객관적 사실(제작 시기 표기 차이, 재료, 크기 180×180cm, 소장처 벨베데레)을 정리한 뒤, 왜 금박이 핵심 장치가 되는지, 왜 남성과 여성의 패턴이 다르게 설계되어 있는지, 빈 분리파(비엔나 제체시온) 맥락에서 이 작품이 어떤 위치를 갖는지, 그리고 “예쁘다”를 넘어 작품을 읽는 관찰 순서까지 안내합니다. 읽고 나면 클림트 키스를 다시 볼 때 감상은 더 섬세해지고, 설명은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서론: 클림트 키스는 왜 편안한 로맨스로만 남지 않을까?
클림트 키스를 처음 마주할 때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금빛이 눈을 붙잡고, 인물의 포즈가 즉각적으로 사랑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죠. 그런데 두 번째 시선부터는 묘한 감각이 끼어듭니다. 사랑의 장면인데도 숨이 약간 막히는 느낌, 따뜻한데도 어딘가 차가운 거리감 같은 것 말입니다. 이 불편함은 감상자의 성향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클림트 키스가 사랑을 “표정”으로만 말하지 않고, “재료와 구조”로 설계했기 때문에 생깁니다.
사실관계부터 단단히 잡아두면 이 설계가 더 잘 보입니다. 클림트 키스는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흔히 오버 벨베데레로 알려진 공간)에 소장된 대표작이며, 크기는 180×180cm로 정사각형에 가깝습니다. 재료 표기는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지만 핵심은 같습니다. 유화 기반에 금박(또는 금·은·백금 잎)을 결합해 반짝이는 표면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또 자주 헷갈리는 부분이 제작 연도입니다. 위키피디아는 1907–1908로, 구글 아트 앤 컬처와 벨베데레의 스토리형 페이지는 1908–1909로 표기합니다. 브리태니커는 완성 시점을 1909로 정리합니다. 이런 차이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언제 착수했는가”와 “언제 완성·전시 카탈로그에 확정 표기되었는가”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클림트 키스를 1907–1909년 무렵, 클림트의 황금기 정점에 놓인 작품으로 보고 분석을 이어가겠습니다.
그럼 질문 하나로 본론을 시작해볼게요. 클림트 키스는 왜 사랑을 그리면서도, 굳이 금빛이라는 “현실 밖의 물질”을 화면 전체에 펼쳐 놓았을까요?
1) 클림트 키스란 무엇인가?
클림트 키스는 한 쌍의 연인이 껴안는 장면을 중심으로 하지만,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려주는 그림은 아닙니다. 배경은 공간의 깊이를 거의 포기했고, 주변 정보(장소, 시간, 구체적 사건)는 최소화되어 있습니다. 대신 화면은 두 겹의 세계로 나뉘죠. 하나는 황금의 배경(무한한 장막처럼 보이는 평면), 다른 하나는 꽃이 피어 있는 가장자리(현실의 감각을 간신히 붙잡아주는 영역)입니다.
이 구성 덕분에 클림트 키스는 특정 커플의 사적인 순간이라기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상징으로 고정되는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빈 관광 공식 안내도 오버 벨베데레에서 클림트 키스를 대표작으로 소개하며 180×180cm라는 크기와 금·은 장식을 강조합니다. 즉, 이 작품은 개인의 로맨스가 아니라 당대 빈의 예술적 분위기(장식, 상징, 표면의 미학)를 응축한 이미지로 기능해 왔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같은 “사랑의 장면”인데, 왜 우리는 이 그림을 평범한 연애 장면으로만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답의 상당 부분은 재료, 즉 금박이 만들어내는 감각에 있습니다.
2) 왜 금박이 핵심일까?
클림트 키스를 멀리서 볼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색채가 아니라 빛입니다. 금박은 물감처럼 “칠해진 색”이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반사되는 “표면의 사건”이 됩니다. 그래서 관객은 그림을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움직이는 순간 그림이 달라지는 체험을 합니다. 이때 사랑의 장면은 단순한 내러티브가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는 시각적 현상으로 바뀌죠.
브리태니커는 클림트가 이 작품을 1907–1908년에 제작하며 유화와 함께 금·은·백금 잎을 사용해 모자이크 같은 반짝임을 만들었다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브리태니커의 ‘작품’ 항목은 클림트 키스를 1909년에 완성된 유화+금박 작품으로 요약합니다. 위키피디아도 유화와 금박(더 나아가 은·백금 잎까지)을 사용했다고 적습니다.
그렇다면 금빛은 사랑을 따뜻하게 만들까요, 아니면 멀어지게 만들까요? 실제 효과는 둘이 동시에 작동합니다. 금은 전통적으로 성화나 제단화, 황금 모자이크의 권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즉, 사랑이 “일상”에서 “의식”으로 승격됩니다. 반면 금은 손에 닿지 않는 재료처럼 느껴져서 친밀한 장면을 오히려 신비화하고, 관객과의 거리를 만듭니다. 클림트 키스가 달콤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봅시다. 왜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있는데도, 각자의 옷(패턴)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개인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까요?
3) 남성과 여성의 패턴은 왜 다르게 설계됐을까?
클림트 키스에서 남성의 옷에는 사각형과 직선 계열의 기하학적 패턴이 강하게 등장하고, 여성의 옷에는 원형, 곡선, 꽃무늬가 두드러집니다. 이 대비는 단순히 “장식이 예쁘다”를 넘어 화면의 긴장을 조직합니다. 직선과 곡선, 단단함과 유연함, 구조와 생명 같은 대립이 한 화면에서 맞물리며, 관객은 자연스럽게 두 인물의 관계를 “감정”이 아니라 “형태의 관계”로 읽게 됩니다.
중요한 건 이 대비가 성 역할을 단순하게 고정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클림트는 서로 다른 패턴을 한 덩어리로 묶어버립니다. 가까이 보면 패턴은 분리되어 있고, 멀리서 보면 둘은 하나의 황금 덩어리가 됩니다. 이건 사랑의 이중성을 꽤 정확히 닮았습니다. 사랑은 분명 둘(개인)이 존재하는 관계이지만, 동시에 둘이 하나의 세계(공동의 감각)를 만드는 사건이기도 하니까요.
벨베데레가 만든 구글 아트 앤 컬처의 스토리형 콘텐츠는 이 작품이 “황금 안개 같은 배경” 앞에 떠 있는 듯 보이며, 꽃이 핀 초원 위에 무릎 꿇은 연인들이 금빛 옷을 입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떠 있음”입니다. 패턴은 인물의 몸을 현실에서 분리시키고, 배경은 공간의 좌표를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땅에 있는 듯하면서도, 현실 밖의 무대에 놓인 상징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네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이 작품은 빈 분리파(비엔나 제체시온)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왜 지금까지도 아이콘으로 남았을까요?
4) 빈 분리파 맥락에서 보면 무엇이 달라질까?
클림트 키스를 “예쁜 사랑 그림”으로만 보면 작품의 절반만 보는 셈이 됩니다. 이 작품은 장식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흔들던 시대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빈 분리파의 흐름은 회화를 단지 창문처럼(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쓰기보다, 표면 자체를 예술의 장으로 만들려는 욕망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클림트 키스는 그 욕망이 가장 설득력 있게 성립한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빈 관광 공식 페이지는 벨베데레가 클림트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클림트 키스가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전시되어 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또한 같은 계열의 안내 문구에서는 이 작품이 1908년 Kunstschau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당시 국가(정부)가 높은 금액으로 구입해 공공 컬렉션에 편입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이 맥락을 알고 보면, 클림트 키스는 개인의 연애 감정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당대 빈이 어떤 미감을 국가적 문화 자산으로 선택했는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확산력입니다. 클림트 키스는 원본 감상 경험이 아니어도 이미지 자체가 강하게 기억됩니다. 정사각형 구성, 황금빛 표면, 패턴의 덩어리감이 즉각적인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작품은 미술관의 대표 이미지이자, 시대를 넘어 반복 재생산되는 아이콘이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실용적인 질문을 하나 남겨볼게요. 클림트 키스를 실제로 볼 때, 어디부터 보면 이 작품이 더 선명하게 읽힐까요?
결론: 클림트 키스를 읽는 가장 좋은 순서
클림트 키스를 더 깊게 읽고 싶다면 “상징의 정답”부터 찾지 않는 편이 오히려 효과적입니다. 대신 관찰 순서를 바꾸면 작품의 구조가 또렷해집니다.
첫째, 가장 멀리서 전체 덩어리를 봅니다. 정사각형(180×180cm) 화면이 하나의 황금 블록처럼 느껴지는지 확인해보세요. 이때 작품은 “사랑 장면”이라기보다 “빛의 구조물”로 보입니다.
둘째, 한 걸음 가까이 가서 패턴의 충돌을 봅니다. 사각형과 원형, 직선과 곡선, 꽃과 기하학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관찰합니다. 이 순간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의 세계를 어떻게 섞는지에 대한 시각적 문법으로 변합니다.
셋째, 얼굴과 손, 목선 같은 피부의 영역을 봅니다. 금빛과 패턴이 과잉인 화면에서 피부는 의외로 조용한 영역입니다. 여기서 클림트는 “인간의 온기”를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소한으로만 남겨두죠. 그래서 관객은 더 집중하게 됩니다. 클림트 키스가 달콤함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이 조절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발밑의 꽃밭 가장자리를 봅니다. 이 부분은 현실의 감각을 붙잡아주는 거의 유일한 지점입니다. 연인들은 무한한 금빛 배경 앞에 떠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꽃이 핀 땅 위에 무릎 꿇고 있습니다. 이 모순이 작품을 오래 남게 합니다. 사랑은 현실을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현실의 바닥을 필요로 하니까요.
정리하면 클림트 키스는 단순히 “사랑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사랑을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재료(금박)와 구조(평면성, 패턴 대비, 정사각형 화면)를 끝까지 밀어붙인 작품입니다. 제작 연도 표기가 1907–1909년 무렵으로 다양하게 제시되더라도, 벨베데레 소장, 180×180cm, 유화에 금박을 결합했다는 핵심 사실은 여러 기관 자료에서 공통으로 확인됩니다. 다음에 클림트 키스를 다시 보게 된다면, “예쁘다”에서 멈추지 말고 “왜 이렇게 설계했을까”를 한 번만 더 생각해보세요. 그 순간 클림트 키스는 유명한 이미지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예술의 언어로 변하는지 보여주는 정교한 지도처럼 읽히기 시작할 겁니다.